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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그룹이 어느새 중반기를 넘어 가고 있다. 평소 아시는 분도 계시고 새롭게 만난 분들도 계시면서 오래된 친구처럼 되어가고 있다. 박스를 세개를 준비물로 가져가야했다. 도대체 상자로 어떻게 나를 표현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집에 있는 상자들을 찾아보았다. 요즘은 그때 그때 버리기를 좋아해서 박스들을 거의 버렸지만, 박스들이 남아있었다.

 

최근에 오카리나를 산 작은 박스, 소리좋아하는 나는 오카리나 박스가 좋았다. 색깔도 푸른색에다 오카리나 그림까지 있었다. 박스 모양도 일반적 박스가 아니라, 뚜겅이 달려있어 좋았다. 또 하나는 빨간색 샌들 박스였다. 망설임없이 이 박스를 골랐다. 내가 제일 좋아 하는 색이 빨간색 이었기 때문이다. 박스 세개를 준비해서 회복그룹에 도착했다.

 

박스 세개로 붙여도 되고 떼도 되고, 다 사용해도 된다고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여러가지 재료들을 잔뜩 준비해 두셨다. 박스를 들고 가서 마음에 드는 재료를 담아와서 자기를 표현해 보는 것이었다. 우리는 박스로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몰라 서로 쳐다보고 웃고 있었다. 박스를 들고 와서 마음에 드는 재료들을 가득 담아 왔다.

 

오카리나 상자로 만들어 볼려니 작아서 빨간색 상자로 만들기 시작했다. 만들면서 뭘 만들고 싶은지 생각이 났다.

상자안에 어릴적 추억들을 만들어 넣기 시작했다. 어릴적 마당있던 우리집에 있던 나무들을 먼저 가장 자리에 세웠다.

들고왔던 재료중 스치로풀을 보니 어릴적 엄마한테 혼나서 밥도 안먹고 집옆에 있던 헛간에서 혼자 있던 그 밤이 생각났다.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데 밑에서 바라보던 함박눈이 얼마나 아름다웠든지 그 눈들을 마당에다 박스 윗면에다 눈을 본드로 붙였다.

 

가지고 있던 구멍난 스치로풀을 보니 20대때 느꼈던 우울한 마음이 생각났다. 잘 지내다 그 구덩이에 빠지면 빠져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기억이 났다. 20년 동안 셀프 프로세싱을 성령님과 함께 하며 그 곳은 양파 껍질 벗기듯 어릴적 나의 아픔와 현재의 나를 연결했으며, 그 구멍난 구덩이는 조금씩 조금씩 메워지기 시작했다. 작은 구멍난 스치로풀을 메우며 그 구덩이를 표현하기 위해 세우면서 밑에 있는 지지대로 컵을 사용해서 메웠다. 나의 우울한 마음들이 메워지고

그곳이 단단한 땅이 되던 그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

 

어릴적 시간을 지나 현재의 나를 표현하는 상자를 만들고 싶어 오카리나 상자를 빨간 상자옆에 붙였다. 내가 가져왔던 부드러운 담요같은 핑크빛 옷감이 넘 마음에 들어 바닥에 깔았다. 현재의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부드럽고 따스한 천처럼 편안하고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의 소망을 담았다. 그리곤 우울한 마음을 표현했던 그 구멍난 스치로풀을 잘라서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를 만들었다. 피아노 지지대로 컵을 사용해서 밑에 받쳤다. 그 지지대는 간단하게 만들어 졌으며, 그 단단함은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이슈가 되지 않았다. 어릴때 아름다운 추억의 눈들을 가져왔다. 즐거운 기억을 가져다 주는 눈 스치로풀은 공을 연상시켜 나에게 오는 사람들이 함께 놀며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뭘 만들지 몰라 망설였던 자아 상자 만들기는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미지의 뭘 해야 할 지 몰랐던 그 재료들이 다 사용되어져서 넘 기뻤다.  자아 상자를 만들며 새롭게 발견한 것은 아픔과 상처와 고통이 많다고 느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돌아보니 즐거운 추억이 많이 있는 것이다. 시골에 살아서 자연으로 말미암아 정서적으로 그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았다.

상자를 다 만들고 우리는 함께 나누었다. 안과 밖중 어디를 먼저 시작했는지 봤을 때 다들 달랐다. 나는 밖은 거의 신경을 안썼다. 상자 자체가 좋아서 간단히 손질했으며 안을 만들었다.

 

작은 손가락 만한 사람이 되어 그 상자 구석구석 다녀 보라 할때, 그 상자를 돌아다녀 보았다. 나는 여전히 구석자리가 편함을 느꼈다. 집에 와서 그 박스를 다시 돌아보며 그 속에서 놀아 봤다. 어릴적 경험했던 따뜻한 햇살을 다시 기억하며 양지바른 곳에 앉아 햇볕을 쬤다. 친구들과 고무 놀이도 하고, 부드러운 카펫을 만지고, 눈을 공삼아 신나게 놀아 보았다.

 

서로 뭘 만들지 막막했던 다른 지체들도 본인을 표현하는 상자를 창의적으로 잘 만들었다. 표현에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던 징검다리님은 조형 미술 작가로 데뷔해도 좋을 정도로 입체적으로 본인을 잘 표현했다. 우리안에 있는 새로운 나를 발견하며 함께 울고 웃는 사이에 우리는 성장해 가고 있다.

 

 

 



아침에 남편이 감동받아 이야기해주었다. 본인의 삶에 의미를 찾았다며 빅터 프랭클린의이야기를 감동깊개 해 주었다.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으로 심리학자이다. 심리학자로 많은 사람들을 치료한 훌륭한 정신 의학자였다. 독일 나치 치하아래서 그는 가스실로 향하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독일인의 고갯질로 삶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아우슈비츠감옥에서 3년간 생활하였다. 그의 아내와 두지식 친구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삶의 희망을 잃어버렸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병으로도 죽고 고문으로도 죽고 영양실조로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죽음의 그림자를 헤쳐나올수가 없었다

절망과 슬픔가운대 있던 그에게 어느날 부인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렸다. 이 죽음의 상황속에서 아내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떠올라며 자신이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존재임을 깨달았다. 삶에 대한 사랑이 그의 마음을 붙들었다.

그는 정신 분석가이기에 정신 차료자이며 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가서 학생들을 가르칠 생각을 하니 삶의 희망이 쏟아오르기 시작했다. 나찌가 자신을 죽일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희망을 찾기시작하고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수 없도다. 말씀처럼 의미상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속에서 단순작업밖에 할 수 없는 상황속애서 사랑하는 아내를 떠올리고 강단 설 그날을 생각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절망속애서 낙관을 찾는다.
비극속에서도 낙관을 찾는다.
피할수 없는 비관속에서도 낙관과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죽음의공포와 어려움을 겪고 감옥에서 풀려나 대학 교수가 되고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에게 희망이 된다. 그의 책 (‘meaning Nevertheless, Say "Yes" to Life: A Psychologist Experiences the Concentration Camp’ )’삶의 의미를 찾아서’ ‘죽음의 수용소에서’ 포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나누었으며 그는 이 책을 통하여 존재의 의미의 중요성과 수용소에서 계속해서 살아갈 의미를 찾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복되는 일상속에서, 우리의 기대치와 먼 우리의삶을 보면서 실망할때가 있다. 오늘 죽음의 공포와 환경속에서도 사랑으로 삶의 의미를 발견한 빅터 플랭클의 배움이 나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가 맞는 절망과 우겨쌈을 당한 것 갵은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과 소망을 가지며 작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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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왜 하는가  (0) 2020.10.21

 

 



요양 병원에 계신 어머니와 일주일이 넘게 연락이 안되었다. 당뇨와 고혈압 때문에 소금을 절제했더니, 전해질이 부족해 지샸다고 진단결과를 받았다. 요즘 코로나때문에 요양 병원에 면허가 안되서 엄마도 무처 답답하실거다.

엄마가 힘이 없어지시고, 걷지를 못하게 되셔서 두달째 병원에 계신다. 엄마는 평생 자식들 밖에 모르고 사시고 매일 통화해야했다. 한 이주 계속 전화드려도 엄마랑 통화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 엄마한테 카톡이 왔다. 드디어 엄마가 전화하셨네.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우신다. 그동안 전화가 고장나서전화를 못 받으셨다고 하신다. 오늘 간호사 선생님께 좀 고쳐 달라했더니, 자세히 봐 주시더니 내트워크 문제라고 전화기를 고쳐 주셨다한다.

엄마는 딸보니 넘 좋다하신다. 엄마는 요즘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보며 어릴때 우리와 많이 놀지도 못하고, 돈 모은다고 맛있는것도 많이 못 사주고 이쁜옷도 많이 못 사줘서 후회된다고 하셨다.

엄마는 정말 악착같이 돈을 버셨다. 세딸을 혼자 키우시면서 시골에 집을 장만하셨다. 딸들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어셨을것다.

‘그래 엄마 내가 한국가면 하루라도 놀아달라고 했는데 출근한다고 안 놀아 주셨잖아’ 했더니, 이제 한국 오면 나랑 실컷 놀아 주실거란다. 막내동생도 엄마한테 아이들 어렸을때 엄마 제발 와서 같이 지내자 할때 엄마가 절대 안오셨다고 섭섭함을 표현했다고 한다.

엄마는 세딸과 아기자기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한게 후회된다고 하셨다. 어릴때는 세딸 캐우시느라 그렇게 바쁘고 힘드신가 했는데, 아이들이 떠난 후에도 엄마는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셨다.

엄마에게 엄마는 참 멋진 여성이라고 말씀드렸다. 여성 혼자서 세딸을 케우시기로 작정하시고,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고 세딸을 훌륭하게 캐우셨으니 말이다.
요즘 새삼 엄마가 그 시대에 자주적인 여성으로 의지의 한국인으로 와 닿는다. 멋진 우리 엄마!!!
나도 어릴적 엄마랑 넘 같이 놀고 싶었는데, 이제는 멀리 외국에 나와 있어 엄마랑 시간을 보낼수가 없다.

이제 또렷해지신 엄마모습을 보니 반갑고 감사하다.
엄마는 건강을 회복해서 손자손녀들 자라는거 함께 보실거라하샸다.

엄마랑 어린시절 함께 보낸 추억은 많이 없지만, 엄마의 사랑과 희생으로 오늘의 우리가 있음에 감사한다.

*자녀들이 함께 있을 때 기억에 남을만한 추억을 만들자.
*자녀들의 고민이 뭔지, 소망이 무엇인지, 사소한 이야기들을 함께 나눠보자.
*사랑해 말로 표현하며 아이들을 안아주자

[커뮤니케이션 진단툴] 조하리의 창(Johari's Windows) 에서 가져온 사진 https://m.blog.naver.com/ksalt7/220060632474#

조하리의 창은 여러번 들어서 알고 있는 이론이다. 자신이 아는 부분과 다른 사람이 아는 부분이 넓어질수록
인간 관계의 폭이 넓어지며 이해가 생긴다.

고향에서 결혼할때 까지 자랐으니, 나는 굳이 내가 누구인지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온식구를 서로아는 작은 동네에서 자랐으니 말이다. 어릴때 부타 자랄때까지 다.

결혼을 해서 남편을 따라 다니며 외국에 살기 시작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어느날 한 지인이 어릴적 아버지의 알콜 중독으로 인해 구타당했던 여러번의 경험을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고, 신기하게 느꼈다. 부끄러운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 내니 우리도 그 분을 이해하게 되고 그 분도 편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이후 나도 나의 이야기를 해내기 시작했다. 어릴적 부모님이야기, 아팠던것 등등 이다. 어느날 한 친구를 붙들며 나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 친구는 나보다 훨씬 더 힘든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의붓어머니와 아버지와 그녀의 자매들이 괴롭혔던 어린시절이야가는 눈물없이 들을수 없어 함께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느낀건 다들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구나였다.
치유와 회복을 위한 그 걸음속에서 배우고 느끼고 회복된 이야기를 친구들과 그리고 글로써 나름 열삼히 이야기를 해 냈던것 같다.

성장통을 앓고 있는 딸과도 이야기를 나누며
딸의 친구가 열심히 자신의 이야기를 Sns를 통해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누는 모습에 영향을 받아 딸도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적기 시작했다 한다.
또한 친한 친구와 내면의 여러가지 이야기를 깊이 이야기 하며 나눈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아는 나의 모습과 다른사람이 아는 나의 모습이 넓어질수록 우리는 좀더 건강한 관계들을 맺어 나갈 수 있을것 같다. 🌷

가족 그림그리기

살며 사랑하며 용서하며/치유와 회복 2020. 10. 30. 22:23 Posted by 푸른바다 셜리



치유 회복 그룹에 참여하면 가족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미술 치료를 공부하며 가족동역화에 대해서 들어 보았었다. 가족이 무언가 하고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어릴적 원가족 그림을 그리는데, 어려움과 아픔이 있었지만,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 우리가 함께 노래할때 가장 즐거웠던 시간을 그렸다. 

 

내가 성장한 가정이 역기능 가족이라 정의하고 그 아픔을 치유하고 회복할려고 오랫동안 씨름했지만, 원가족의 가족 역기능 검사를 했을 때 오히려 그 수치가 높지 않았다. 아빠가 부재한 가정이었지만, 엄마의 헌신과 희생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주셨고 세딸이 서로 본딩하고 자라 나름 우리는 조금만 주위의 도움이 있으면 회복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어릴때 시골교회가 우리의 큰 가족이 되어 주어 우리는 그나마 든든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가족 그림에서 가족의 위치와 거리가 내 마음의 거리를 반영한다고 한다. 막내 동생이 나와 심리적 거리가 가까웠다. 

특히 뒷모습을 보이는 가족이나, 여러번 고치는 가족과는 마음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싱글 맘이었던 엄마, 아빠의 자리까지 감당해야 했던 엄마, 세딸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가장 엄마와의 심리적 거리로 융합적 관계가 되어 엄마와의 관계를 씨름한 증거가 그림에도 나타났다. 엄마의 자리를 고민하고, 모습을 고민하면서 여러번 고치기도 했다. 

 

가족 그림을 통해 삶의 무게로 우리가 자라는 이쁜 모습을 즐감할 시간이 없었던 엄마에게 마음의 애잔함을 느꼈다. 장녀로 엄마의 빈자리를 메워야 했던 나에게 마음이 쓰여 마음의 눈물을 만나며 어린 나를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함께 가족그림그리기에 참여한 동료들의 위로의 말을 들으며 따뜻한 마음의 감동을 받았다. 10여분의 짧은 시간에 그린 원가족 그림그리기를 통해 어릴적 나를 다시금 만나며 가족들도 다시 만나며, 마음의 눈물과 위로를 가져오는 시간이 되었다. 

동생들에게 보여주었더니 본인들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본다. 이쁘게 그려줬다고 좋아했다. 그림치료를 공부한 동생이 자신에게 엄격하냐고 물어봤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했더니 자기도 녹색을 사용했었는데 선생님이 자신에게 엄격하냐고 물어보았다고 했다. 생각해 봐야 할듯하다. 상담 선생님께서 그림이 작게 그려졌지만, 앞으로 얼마든지 커질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더 커져야 할 부분은 어디일까? 더 성장해서 충만하고 행복해지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

투사는 자기의 모습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자신이 의식적으로 억누른 자신의 모습을 타인의 것으로 보는 것이 투사혹은 투영이다. (위키피디아)


 

 

 

부부가 살때 서로 스트레스 받았을 때 어떤 방어기제를 사용하는지 파악하면 서로 대처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부부생활 25년이 넘어가면서 남편의 방어기제가 작동할때 처음에는 거기에 휘말려 들어 함께 부정적 반응을 해서 

서로 기분이 나쁘게 되는 수가 많았다. 

 

시행착오를 10년이상 겪은 뒤 어느날, 휘말리지 말자고 결심했다. 

남편의 방어기제가 나왔을 때, '아 그랬군요' 하고 그 사람의 감정이나 의견을 그 사람것으로 인정해 주고 그랬군요 했을 때 남편도 곧 마음이 풀리고 나도 휘말리지 않아 우리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삶을 돌이켜 보면 나는 남편의 성격때문이라고 탓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나의 투사가 아니었을까? 반성과 함께 되돌아 보아진다. 나 자신안에 그를 담을 만한 그릇이 아니었고, 내안에 억눌러진 것들을 오히려 상대에게 탓하고 투사함으로 방어기제를 사용하고 사는 시간이 있었다. 

고통의 시간을 지나 사랑과 수용과 용서와 이해함을 배워 함께 하는 삶을 즐거워 하게 되었다.  

25년의 시간을 지나며 함께 성장하고 치유된 시간들이 감사하다. 

 

 



서른이 넘어서 외국생활이 시작되었다. 외국학교에서 외국 친구들과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을때, 나는 경쟁심이 몸에 베겨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에 벤 경쟁심리는 어디에서 왔을까? 생각해 보았을때 한국에서의 학교교육과 환경에 원인이 있는 것 같았다. 학교 수업이 있을때 마다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초등학교때는 제일 가까운 친구에게
공부인하고 자는 것처럼 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좋은 성적을 내야했고, 친구들과 경쟁에서도 이겨야 했던것 같았다.

다른 문화 서양의 문화를 만나며 윈윈의 개념이 좋았다. 나도 잘되고 너도 잘되고 그리하여 우리가 잘되는 윈윈 개념을 만나며 나의 삶이 확장됨을 느꼈다.

우리나라는 좁은 땅위에서 돌아보면 사람들로 둘러쌓여있다. 먹고살기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겨야했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선위의 경쟁을 해야했다. 경쟁은 우리의 마음과 몸에 스트레스를 준다. 이기기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아가는게 이상적일 것이다.
윈윈:나도 잘되고 너도 잘되고 우리가 잘되며 행복해 지는 삶을 생각해본다.

나의 잘하는점 즐거워하며 스스로를 격려해 보자.
친구의 잘하는 점을 칭찬하자, 격려하자.

죽음을 준비하다.

살며 사랑하며 용서하며/생활 지혜 2020. 10. 22. 21:05 Posted by 푸른바다 셜리



80세가 넘으신 노 목사님 부부와 줌으로 성경공부를 했다. 미국과 말레이시아의 다른 시간대에도 불구하고 매주 만나 두 분의 지도를 받으며 함께 마주 하는 시간이 의미가 있다. 

 

오늘 주제 가운데 죽음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목사님 죽음을 준비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제 나이도 있고 저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책도 정리하고, 필요 없는 것들 버리구요. 나중에는 온 가족이 함께 예배 드리고 평화롭게 죽고싶고 내가 죽을때 천사들이 마중 왔으면 좋겠어요.”하며 미소를 지으셨다.

잠시 우리는 침묵이 이어졌고 나의 마음에는 감동이 찾아 왔다. 죽음을 준비하시는 목사님이 아름답게 보이신다. 나는 아직 목사님에 비하면 젊지만, 나 또한 겸허한 마음으로 영원한 집으로 갈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건강하게 세시간 넘게 시간을 함께 하시는 두분께 감사를 드리며 평화롭게 은혜롭게 영원한 집으로 이사갈 날을 꿈꿔본다. 🌷🌷

공부는 왜 하는가

살며 사랑하며 용서하며 2020. 10. 21. 05:39 Posted by 푸른바다 셜리


나의 인생의 중요한 버팀목 중의 하나는 공부이다.
7살때 아버지가 세딸을 낳은 어머니를 떠나 아들을 낳아 장손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다. 그 즈음 마지막 기억은 아버지가 나의 이름을 적도록 가르치는 장면이다.

내이름은 아주 쉬웠지만, 나는 왜 그렇게 배우기가 어려웠을까? 아버지한테 혼나면서도 깨치지 못했다.
우리를 떠난 아버지는 한달에 한번씩 편지를 적어 보내 주셨다. 그 글을 읽는 어린 나의 마음에는 글과 아버지의 사랑이 연결되지 읺았을까?

아버지가 떠난 빈 자리에 엄마는 열심히 공부하는 나를 지원하는 재미로 그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셨다. 나는 공부하고 공부했다. 어릴적 시골 우리 마을에서는 공부잘하는 나로 인정받았다.

어릴적 어려운 환경으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삶의 돌파구는 공부였다.
나에게 주어진 돌파의 힘은 공부얐다.

공부
아버지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엄마의 기대에 부응했다.
인정을 받았다.
답답한 현실에서 돌파의 힘이 되었다.